[김영범의 시시콜콜한 이야기]가지치기
[김영범의 시시콜콜한 이야기]가지치기
  • 충청매일
  • 승인 2021.03.30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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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청주민예총 사무국장

[충청매일] 벚꽃이 만개했다. 언제나 꽃들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옷깃을 여미는 바람에도 꽃은 꽃망울을 맺고 있었다. 핏기 하나 없는 몸에서 피어난 지천의 꽃들을 보니 봄이 실감 난다.

사실 무심천의 버들가지 연초록 잎이 돋을 무렵 나는 봄을 예감했다. 아파트 화단의 목련, 산수유나무 가지가 전지(剪枝)된 새벽에도 봄을 예감했다. 늦은 눈발 날리고 난 후 아파트 관리소 직원들은 분주히 가지치기를 시작했다. 이맘때면 의례 하는 작업이었다. 겨우내 애써 키운 새 가지가 싹둑싹둑 잘려 나갔다. 키 성장을 억제하는 작업이다. 과실수의 경우 농사 작업의 편리성과 더 많은 열매를 수확하기 위해 가지치기를 한다. 상처 잎은 나무는 죽음을 예감하고 더 많은 꽃을, 더 많은 열매를 맺어 생을 이어가려 한다. 누군가의 처절한 생의 몸부림을 통해 누군가는 가치를 얻는 것이다.

울퉁불퉁 근육질의 키 작은 목련이 순백의 연등을 주렁주렁 매달았다. 봉오리마다 연화대좌(蓮華臺座)이니 지성을 드렸어도 부족한 판에 가지란 가지를 잘라놨으니 이런 불온이 어디 있겠는가.

도로에 플라타너스는 또 어떤가. 지난봄에 잘려 나간 볼품없는 가지가 겨우내 찬 눈을 맞아 상처는 곪아 터지고 덧난 상처는 딱지가 덧쌓였다. 전신주를 건드리고 상점의 간판을 가린다는 이유로 무차별 잘려 나뒹구는 가지들, 이제 막 새잎이 돋고 나름의 삶을 시작하려 할 때 어김없이 잘려 나가는 나뭇가지들을 보며 인간을 위해 인간이 심었으니 인간을 위해 상처 내는 일이 당연한 듯하지만, 나무도 어엿한 생명인 것을 함부로 나무의 삶을 재단할 권리가 있을까.

아직은 어린아이처럼 보이지만, 아들 녀석은 다 컸다며 의견 대립이 많아졌다. 서울로 학교에 간 후로 집에 있는 시간이 자연스럽게 줄었다. 떨어져 지내는 시간만큼 아들과의 거리도 멀어지는 건 아닌지 걱정되고 속상하다. 그렇다 보니 잔소리가 많아진다. 낯선 서울 생활에 혹여 나쁜 일이 있지는 않을까, 사고는 나지 않을까 늘 노심초사다. 이것 하지 마라, 저것 하지 마라, 하지 않았으면 하는 아들의 행동이 늘어난다. 아들은 아들 대로 잔소리 듣기 싫은 나이가 되다 보니 언제까지 품에 안고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아들을 걱정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내가 불안하기 때문에 잔소리가 늘어난다. 연습실에 간 줄 알았던 아들이 저녁이 다 되어서 경기도 화성에 있다는 통화를 하고 불같이 화를 냈다. 친구를 만나기 위해 조치원에서 천안으로 기차를 타고 천안에서 지하철을 이용해 화성에 간 아들의 정성이 기특해서라도 화만 낼 수는 없었다. 혼자 버스 타는 일도 걱정되던 때도 있었으니, 버스와 기차, 지하철을 갈아타며 청주에서 화성까지 간 아들을 보니 나의 걱정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라는 이유로 자식의 곁가지를 마음대로 잘라내려 하고 마음대로 재단하고 자식의 삶이 아닌 부모의 마음에 맞는 모양으로 화단의 정원수처럼 키우려 하는 것은 잘못이다. 쏘다니기만 한다고 다리몽둥이 분질러 놓겠다고 으름장을 놓던 나의 엄마는 한 번도 말을 행동에 옮긴 적 없었다. 그래도 엄마의 지청구 덕에 나의 옹이 진 삶은 단단해졌고 나의 곁가지가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지 않으려 노력했다.

아들의 삶을 가지치기 할 수 없듯이 화단의 목련도 15층 나의 창문에 닿기를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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