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범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벌초를 하며
[김영범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벌초를 하며
  • 충청매일
  • 승인 2019.09.03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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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청주민예총 사무국장

[충청매일] 보은 회인 출신 오장환 시인은 1936년 ‘성씨보’라는 시를 발표했다. ‘똑똑한 사람들은 항상 가계보를 창작하였고 매매하였다. 나는 역사를, 내 성을 믿지 않어도 좋다’(시의 일부) 이 시를 통해 오장환 시인은 관습화된 전통을 부정했다. 나 역시 나의 가계보를 믿지 않는다.

족보는 조선 초기에 처음 출현하였다고 한다. 당연히 양반만의 특권이었을 것이고 권력의 유세나 세습을 위해 지어졌을 것이다. 현대에 와서 족보는 혈연의 유대를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안동 김씨니, 전주 이씨니 하는 성씨에 파까지 같으면 혈연이 완성되고 친밀도가 높아진다. 그러나 혈연, 지연, 학연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기도 하는 혈연이 문서 하나로 의심 없이 정해지는 것도 의아하다. 오장환의 말대로 가계보가 창작되고 매매되던 시절이 있었으니, 내가 왜 김씨인지 알 수 없다.

내 고향은 김해 김씨가 모여 살던 씨족 마을 이었다. 명절이면 새벽부터 늦은 오후까지 온 동네를 돌며 차례를 지냈다. 고조부의 자손들이다. 우리 집은 두 번째로 차례를 지냈는데, 말하자면 고조부 형제 중 둘째다. 동네 형들은 다 아저씨뻘이고 형이지만 조카뻘도 있었다. 자손이 번성하여 그 넓은 땅 소유주가 제각각이지만, 처음 터를 잡은 조상은 얼마나 부자였기에 너른 땅을 가질 수 있었을까. 이것을 보면 돈을 주고 가계보를 창작하고 매매하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아니면 장사꾼으로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추석을 맞아 조상의 묘에 벌초를 하며 문득, 나의 조상이, 나의 고향의 역사가 궁금해졌다. 오래전 첫째 고조부 자손이 고향을 떠나고 둘째 고조부 자손인 우리 집은 온갖 제사를 다 모시는 마을의 큰집이 되었다. 그런데 왜 재산이 별로 없을까. 하천을 끼고 자리한 비옥 농토에 우리 땅은 없을까. 조상 중에 가산을 탕진한 분이 계실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와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반쪽만 남은 선산에는 질서 없이 묘들이 자리하고 있다. 가장 위에서 두 번째가 증조부 묘고 바로 아래 조부와 조모 묘가 자리한다. 벌초는 증조부 자손별로 한다. 그러니까 조부 형제의 자손 끼리 날을 잡아 벌초를 하는 것이다. 십여 구의 묘 중 증조부와 조부모 묘만 허름하다. 봉분에 잔디가 자리 잡지 못하고 듬성듬성 흙이 드러나 있고 작은 나무 묘목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반면 다른 묘는 대리석으로 정비가 되어있고 그럴싸한 묘비도 있었다. 자손이 가난하여 조상의 묘가 창피하다고 말해야 하나, 가계보를 믿지 않는 나는 자존심이 상했다. 도시에서는 비싼 아파트에 사는 것이 신분의 격이라 믿는다면 시골에는 조상의 묘에 들인 돈에 따라 어깨가 으쓱해지는지 모른다. 내게 남아있는 가부장적 유전자는 이런 생각에까지 미치게 한다.

벌초를 마치고 시골집에 들렀다. 오랜 투병과 노환으로 다리에 힘이 없어지는 오래된 엄마는 자식들 밥걱정뿐이다. 남들 못지않게 돈도 많이 벌고 높은 자리에 있어야 김해김씨에 시집와 고생한 보람이 있을 것인데, 자식 자랑은 물 건너갔으니 건강만 했으면 좋으련만, 엄마의 무릎도 무너지는 조상의 묘처럼 아프다.  

마을이 물에 잠기면서 뿔뿔이 흩어지고 작은할아버지 자손과 아버지 형제 자손끼리 차례를 지낸다. 이제 우리의 가계보는 어떻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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