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의 山城 山寺 찾기]공산성에는 오늘도 깃발이 날리네 1
[느림보의 山城 山寺 찾기]공산성에는 오늘도 깃발이 날리네 1
  • 충청매일
  • 승인 2016.08.22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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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주 충북수필문학회장

공산성은 문주왕 1년(475) 한산성에서 웅진으로 옮겨와 성왕 16년(538)에 부여 사비성으로 천도할 때까지 64년간 도읍지인 공주를 수호한 왕성이다. 660년 의자왕이 백제 700년 사직을 당나라 소정방에게 고스란히 넘겨준 슬픈 역사를 담은 성이다.

본래 웅진성이라 했는데 고려 때부터 공산성으로 부르기 시작했고, 조선 인조가 몽진을 다녀간 이후로 잠시 쌍수산성(雙樹山城)으로 불리기도 했다. 금강을 끼고 나지막한 계곡을 둘러싼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다. 축성 당시에는 토축이었는데 임진왜란 이후에 돌로 고쳐 쌓았다고 한다. 토성이 400m가량 남았고, 동서에 부속성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성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바라보면 아름다운 금서루(錦西樓)와 거대한 성벽이 보인다. 금서루는 뚝눈으로 보아도 최근에 복원한 흔적이 뚜렷하다. 청주 상당산성 공남문처럼 조선시대 문루 양식을 재현하느라 애쓴 흔적이 보인다. 그런데 문루 아래 문은 출입할 수 없고 출입문은 따로 있는 것이 공남문과 다르다. 현재 출입할 수 있는 문은 본래 금서루가 있던 자리이고, 복원하면서 왜 그랬는지 문루를 남쪽으로 조금 이동한 것이다.

성석은 견고한 자연석을 사각형으로 다듬었는데 모양과 크기는 일정하거나 정교하지 않았지만, 쌓기는 빈틈이 조금도 없었다. 상당산성 공남문은 문루 위에서 문을 통과하는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마루로 되어 있는데 비해 천정에는 그림만 있었다. 양쪽 성벽 위에서 공격할 수 있는 옹성(甕城)도 없다. 성벽을 복원하면서 옹성을 생략한 것 같아서 안타까웠다. 백제 문주왕 때 쌓은 토성을 조선시대에 고쳐 쌓았다면 복원할 때 최소한 조선시대 성곽 양식을 적용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누각 주변 성벽 위에 치성은 재현해 놓아서 보기 좋았다.

남쪽으로 뻗은 성벽 위의 길에 올라 금서루를 보았다. 누각을 돌로 둘러싸서 안에 함부로 들어갈 수 없도록 만들었다. 북으로 이제 한 바퀴 돌아내려올 성곽과 공북루가 한 눈에 보였다. 금서루를 지나 봉우리에 있는 공산성 전망대 너머로 금강과 공주의 신시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백제가 1500년을 넘어 현대와 조화를 이룬 모습이 한눈에 보인다.

노란 깃발이 펄럭인다. 깃발을 자세히 보니 호랑이 그림이다. 깃을 하얀색으로 둘렀으니 서백호이다. 북에 등을 두고 남을 바라보면 우백호(서), 좌청룡(동), 남주작(홍), 북현무(흑)이다. 펄럭이는 호랑이 그림이 나를 과거로 이끄는 기분이다. 금방이라도 무령왕이 행차에 앞서 금서루 앞에서 근위병의 교대식과 행진이 벌어질 것만 같다.

성벽은 자연석을 네모나게 다듬어서 쌓았다. 역시 크기는 일정하지 않았다. 바깥쪽은 축대처럼 아랫부분을 더 두껍게 쌓고 그 위에 5, 60cm쯤 줄여서 담장처럼 쌓아 올리고 안쪽을 흙으로 채워 마무리했다. 시에서 성벽 위에 따로 길을 내어 사람들이 산책하기 좋게 했다. 넓지는 않지만 남녀가 손을 잡고 걸을 수 있는 넓이는 됐다.

어린이로부터 젊은이 노인들에 이르기까지 산책하는 시민들이 많다. 특이 젊은 연인들이 산책하면서 데이트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연인들은 스스로 왕과 왕비가 된 기분일까, 아니면 병사와 가난한 아내가 된 기분일까

성곽 주변에는 참나무나 소나무가 많다. 바깥쪽으로는 길을 낼 수 없을 만큼 가파르고 안쪽으로는 완만해서 성 어디서든지 성내로 통하기는 좋을 것 같았다. 때로 안쪽으로도 경사가 급한 곳이 있어서 축성의 방법도 바깥쪽처럼 기단과 상단이 구분되어 있었다. 그래서 아래쪽의 너비와 위쪽의 너비가 차이가 많이 난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자 깃발이 주작으로 바뀌었다. 홍색 깃발이 나부끼는 사이로 넓고 평평한 왕궁지에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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